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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3!

아자쿠 :: 열려라 그대

✨​ 2018. 5. 14. 01:36

텅 빈 운동장 위에 길게 드리어진 그림자가 일렁인다. 낡은 글러브를 꼭 쥔 채 크게 와인드업하고, 오른쪽 다리를 들어 길게 뻗어 딛는다. 그와 동시에 뒤로 당겼던 반대쪽 팔을 힘차게 휘둘러 던지면, 라벤더 빛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두 세 방울씩 땀이 흩어지는 게 보였다. 그런 식의 투구연습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한다. 쿠몬은 방과후만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여기 한적한 강변으로 찾아와 홀로 연습을 하곤 했다. 쉬지도 않고 도대체 어디서 저렇게나 던질 힘이 나오는 건지. 마흔 번이 넘어가자 아자미는 투구 연습의 수를 세는 것을 포기했다.

 

그가 그런 쿠몬의 모습을 매일같이 남몰래 보게 된 건 그렇게 오래 된 일은 아니었다. 처음엔 정말 우연히, 하굣길에 여기서 혼자 있는 쿠몬을 발견했다. 저런 데서 뭐 하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야구 연습 같아 보였다. 야구부도 그만둔 주제에 뭐가 미련이 남아서 글러브도 책가방에 챙겨 다니나 싶었다. 공도 없이 팔 휘두르기만 계속 하면 안 힘드나.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연습을 보고 있었다. 잔뜩 힘을 준 팔뚝, 격한 숨으로 크게 들썩이는 어깨, 찡그린 눈썹 밑으로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 그런 별 것 아닌 것들이 넋을 놓고 그저 계속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그 모습에 혼이 나갔었다. 말을 걸어 같이 돌아가자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그냥 보고 있고 싶었다. 결국 그렇게 쳐다보기만 하다 혼자 기숙사로 돌아갔다.

 

똑같은 일을 반복한 지 3일째에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오늘은 연습을 보러 온 지 7일째다. 쿠몬은 놀랍게도 완전히 같은 내용의 연습을 일주일 동안 반복하고 있었다. 아니, 목격한 지 이레니까 아마도 훨씬 전부터 저런 무식하게 지루한 팔 휘두르기만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런 바보 같은 광경을 좋다고 쫓아와서 몰래 보고 있는 자신도 이상하긴 하지만. 교복을 입은 채로 연습에 몰두해 있는 모습을 보면,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시선이 빠진다. 야구할 때는 저런 표정을 하는구나. 그런 별 의미도 없는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쿠몬과 눈이 마주쳤다.


망했다, 방금 여기 봤─


깜짝 놀라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소용이 있을 리가 없었다. 우렁차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태연한 척을 하며 다시 운동장 쪽을 쳐다보자, 입이 찢어질 만큼 웃으며 높게 뻗은 팔을 크게 흔드는 쿠몬이 보였다. 자연스레 따라서 웃음이 나왔다.


아자미! 무슨 일이야? 기숙사 가는 길?

……어. 지나가는데 네가 야구하고 있길래.

진짜? 완전 우연이네!

.


거짓말이다. 사실은 네가 혼자 연습하는 게 너무 예뻐서 일주일 동안 매일 학교 끝나자마자 달려와서 몰래 보고 있었어. 라고는 절대 죽어도 말 못한다. 들키면 안 되는 걸 들킨 기분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눈앞에서 바보같이 환하게 웃고 있는 이 얼굴 때문에 더 그랬다.


다행이다! 있지, 나 혼자서는 공 가지고 연습 못해서. 같이 캐치볼 하자!

싫어. 피곤하니까 집에 갈 건데.


빨리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캐치볼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이유 모를 싱숭생숭한 기분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런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눈앞의 야구바보는 그러지 말고 같이 하자며, 언제 꺼내왔는지 모를 야구공을 들고 떼를 쓰고 있다. 낑낑대는 모습이 꼭 공 물고 있는 강아지 같다. 피식 싱거운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배고프니까 가서 저녁 먹고 해줄게.

진짜?! 약속했다! ~ 밥 얘기하니까 나도 배고프네.

 


그 뒤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체육시간에 축구를 하다가 공 대신 신발이 날아갔다거나, 교실에 커다란 벌이 들어와서 소동이 일어난 이야기 등등, 대부분 쿠몬이 겪은 바보 같은 경험들을 늘어놓고 아자미는 그걸 들을 뿐이었지만. 그냥 그게 좋았다. 나란히 걷는 옆 사람의 발을 보며 걸음걸이를 맞추었다. 매일같이 지나던 똑같은 하굣길이 두 사람의 추억으로 새로 물들어 갔다.


와…! 아자미, 저기 봐봐!


손가락 끝을 따라가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듯한 색을 한 저녁하늘이 보였다. 짙은 푸른색 하늘에 거의 다 져가는 해의 잔광이 구름을 비추어, 보라색이면서도 분홍색 같기도 한 신기한 색이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또 바보 같은 소리를 한다.


진짜 맛있겠다!

너 배고파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지.


시큰둥한 핀잔에도 그저 헤실헤실 웃는 모습에 아자미는 당해낼 수가 없다. 결국 가는 길에 근처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 들고 나왔다. 하늘은 그새 완전히 밤으로 바뀌어, 희미하게 별들이 조금씩 보일 정도였다. 감색 하늘에 북극성의 위치를 가늠해보며 아자미는 막대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아까는 그렇게 시끄러웠던 쿠몬도 아이스크림 덕분에 조용해진 것 같았다. 들릴 듯 말 듯 한 발소리를 배경으로 그렇게 말없이 기숙사까지 걸었다. 먼 하늘만을 바라보며 걷는 쿠몬을 힐끔 곁눈질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자미는 아주 조금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다.


루프리텔캄. 이루어질 리 없는 주문을 속으로 외웠다.

 

 

*

 

 

익숙하지 않은 빳빳한 가죽의 느낌이 어색하다. 아자미는 글러브를 낀 손을 괜히 반대쪽 손으로 툭툭 쳐보았다. 저녁식사 후에 약속대로 마당으로 나왔는데, 스윙 연습을 하던 쿠몬이 진짜로 나와줬냐며 놀랐을 때는 조금 짜증이 났다. 날 뭐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도 이내 밝게 웃으면서 글러브를 건네는 모습에 또 사르르 녹았더랬다. 이 글러브도 쿠몬이 쓰던 거겠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쿠몬은 그저 손에 쥔 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쿠몬, 나 여기 서면 돼?

, ! 근데 있잖아, 나 그 전에 할 말이 있는데…….


답지 않게 우물쭈물 뜸을 들이는 모습에 무슨 말이냐며 재촉했다. 설마 이제 와서 피곤하니까 내일 하자느니 그런 이야기라면 사양이다. 모처럼 같이 야구 비스무리한 걸 하는 거니까.



그게, 사실은……. , 나 아자미가 좋아! 사귀어주세요!!

 

서늘한 밤바람이 부는 소리만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10초가 10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적막 속에서 아자미는 냉동인간이라도 된 마냥 굳어 있었다. 그러니까……. 귀를 의심했다. 얘 방금 뭐라고 했냐.


가가갑자기 얘기해서 놀랐지! 미안! 그치만 나 꽤 예전부터……. 그리고 아자미도 봤지? 투구 연습하는 거. 나 고백하려고 엄청 열심히 연습했어.


본인이 이야기해놓고 본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귀까지 새빨개진 쿠몬이 와르르 쏟아내는 말들은 한번에 알아듣기 어려웠다. 고백, 투구, 연습, 그런 단어들이 들렸지만 이어서 뜻을 유추하기는 관련성이 너무 없어 보였다. 아자미는 굳은 채 그대로 혼란스러운 머리 속을 정리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마 쿠몬 못지않게 얼굴도 엄청 새빨개졌을 거다. 그런 아자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왜인지 모를 탄력을 받은듯한 쿠몬은 인생 첫 고백을 있는 힘을 다해 말 그대로 던지려 하고 있었다.


이 공 받으면, 내 고백 받는 거다!


그렇게 외치며 몇 발자국 뒤로 움직인 쿠몬은 곧바로 투구 자세를 취했다. 꽉 다문 입술 위로 정면을 노려보는 눈동자에서 왠지 엄청나게 강렬한 결의가 느껴졌다. 뭔지 모르겠지만 저건 받아야 한다. 아자미는 글러브를 쥔 손을 들어 공을 잡을 준비를 했다.

내 모든 마음을 담아서, 최고의 직구를 던지는 거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무릎을 높게 들어 와인드업하고, 공을 쥔 왼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왼팔을 세게 꽂아 내렸다. 완벽한 회전의 패스트볼은 가엾은 야구 문외한에게 가차없이 뻗어갔다.

 


퍽─. 투박한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인영이 보였다.

 

아자미이이이이!!!!

 

효도 쿠몬의 첫 사랑 고백은 그의 16년 인생 중 가장 완벽하고 빠른 스트레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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